가상 현실의 시대에 육체성을 회복시키는 생명의 예식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으로 읽는 현대 사회(92)

기호와 상징의 숲을 지나 실재의 식탁으로 초대하는 신비

법적 보증과 존재적 연합을 잇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제도

감각을 통해 영원을 만지는 거룩한 약속의 인장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92문

 

Q. What is a sacrament? A. A sacrament is an holy ordinance instituted by Christ; wherein, by sensible signs, Christ, and the benefits of the new covenant, are represented, sealed, and applied to believers.
문. 성례란 무엇입니까? 답.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거룩한 예식인데, 거기서 감각적인 표징들로 그리스도와 새 언약의 유익들이 신자들에게 표시되고 인쳐지며 적용됩니다.


-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 17:10)
- 출애굽기 12장 
-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고전 11:23)
-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이미지 제공=수현교회]

 

인간은 끊임없이 '확증'을 갈구하는 존재다. 연인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반지를 나누어 끼고, 국가는 법적 권위를 보증하기 위해 공적 문서에 붉은 인장을 찍는다.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가치가 인간의 삶 속에서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각할 수 있는 형태를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92문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신비로우면서도 실제적인 장치인 '성례(Sacrament)'를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한다. 성례는 단순한 종교적 퍼포먼스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신 거룩한 예식이며, 보이지 않는 하늘의 신비를 우리의 오감(五感) 안으로 끌어당기는 은혜의 수단이다.

 

기호학의 창시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는 기호가 '기표'(Signifiant, 소리나 이미지)와 '기의'(Signifié, 개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성례는 이 기호학적 통찰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하는 신학적 기호다. 물, 떡, 포도주라는 '감각적인 표징'은 기표가 되고, 그 안에 담긴 그리스도의 희생과 새 언약의 유익은 기의가 된다. 그러나 성례는 단순한 기호를 넘어선다.

 

소요리문답은 성례가 단순히 의미를 '표시(represent)'할 뿐만 아니라, '인'(seal)치고, '적용(apply)'한다고 선언한다. 이는 일종의 '보증 계약'과 같다. 자산의 가치가 확실할 때 발행되는 인증서처럼, 성례는 신자가 소유한 구원의 가치가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임을 확증하는 전우주적인 인장이다.

 

우리는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대속을 귀로 듣지만, 성례를 통해 그것을 손으로 만지고 혀로 맛보며 코로 향을 맡는다. 성례는 신앙의 내용을 장기 기억으로 전이시키는 '경험적 앵커링(Experiential Anchoring)'의 역할을 수행한다. 물이 몸을 씻어내듯 그리스도의 보혈이 영혼을 정결케 함을 경험하고, 떡을 떼어 먹듯 그분의 생명을 내면화하는 과정은 신앙을 '관념적 유희'에서 '존재적 실재'로 변모시킨다. 이는 현대인이 겪는 '영성적 공허함'이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은 비대하나 체험이 빈약한 비대칭성’을 해결하는 심리적 치유책이 된다.

 

인장(Seal)은 그 계약의 유효성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도구다. 도장이 찍히는 순간 계약은 집행력을 갖는다. '인친다'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법적 효력을 신앙의 영역으로 가져온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분의 약속이 흔들리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성례라는 '가시적인 말씀'을 주셨다. 어거스틴(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은 성례를 가리켜 '보이는 말씀'이라 불렀다. 설교가 귀로 듣는 복음이라면, 성례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복음이다.

 

현대 사회는 디지털 가속화로 인해 육체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메타버스와 가상 현실 속에서 인간의 존재는 픽셀로 분해되고, 관계는 화면 뒤로 숨는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성례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성례는 반드시 물리적인 물질과 공동체의 현존을 전제로 한다. 직접 물을 적시고, 떡을 씹으며, 잔을 마시는 행위는 우리를 다시 '몸'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그리스도께서 영으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육신을 입고(Incarnation) 오셨음을 성례는 매 순간 증언한다. 따라서 성례에 참여하는 것은 파편화된 자아를 딛고 일어나 그리스도라는 거대한 몸의 지체로 통합되는 사회적, 관계적 결합을 의미한다.

 

또한 성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준으로 낮아지셔서 베푸시는 지극한 배려의 산물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감각 안으로 자신을 구겨 넣어 전달하시는 사랑의 방식이다. 우리는 성례를 통해 그리스도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하나가 된다. 떡이 우리 몸의 영양분이 되듯,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 삶에 실질적으로 작용하여 능력이 된다.

 

우리는 성례를 지루한 형식이나 전통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성례는 메마른 일상에 하늘의 생기를 불어넣는 창문이며, 불안한 미래를 담보하는 영원한 계약의 증표다. 성례의 식탁에서 우리는 비로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지고, 들리지 않는 하늘의 음성을 맛보며, 이 땅을 살아갈 하늘의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허동보 목사(Rev. Huh Dongbo) | 수현교회(Suhyun Church)
저서 | 『왕초보 히브리어 펜습자』, 『왕초보 헬라어 펜습자』, 『왕초보 히브리어 성경읽기』, 『고난, 절망의 늪에서 피어난 꽃』, 『부와 기독교신앙』, 『그와 함께라면』, 『만남』, 『AI시대, 히브리어로 답하다』 외

 

 

 

작성 2026.05.29 04:27 수정 2026.05.29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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